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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속활자, 종이, 그리고 사판
작성자 : 조웅래 작성일 : 2022-05-23조회수 : 46

#사판 #종이 #제지술 #금속활자 #글씨

사판

조선시대에는 종이가 매우 귀했습니다. 때문에 서민들이나 종이를 구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종이에 글을 쓰는 대신 사판을 사용했습니다. 사판은 넓직한 널조각에 고운 모래를 담아 만든 글씨 연습용 판입니다. 조선시대의 아이들은 지금의 초등학교라고 볼 수 있는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습니다. 서당에는 평민들의 자녀들부터 양반들의 자녀들까지 다양한 계층이 글을 배우러 왔습니다. 서당에서는 천자문과 소학을 배웠습니다. 또 양반들을 자제들은 벼슬을 얻기 위한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유교 경전이나 역사도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서당을 졸업하기 위해 서당에서 배우는 모든 책들을 암기해야했으며 책 하나를 다 암기해야지만 다른 책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나이가 많지만 낮은 수준의 책을 공부하는 이도 있었고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또래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책을 공부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계층이 서당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귀하고 비쌌던 종이를 구하지 못 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종이와 먹을 구하기 어렵던 시절 아이들이 글씨연습을 할 수 있게 주로 아버지들이 손수 만들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래 위에 나무막대로 글씨를 쓴 다음 다시 모래를 평평하게 덮는 방식으로 글씨연습을 했습니다. 종이가 얼마나 귀했냐면 삼국시대에는 사용한 종이의 뒷면도 사용하고 포장지로 사용할만큼 값이 비싸고 귀했습니다. 조선은 학문을 장려하는 나라였기에 많은 종이책을 발행하게 되자 종이가 부족해져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재배하길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왕세자 또한 글씨 연습을 할 때 종이가 아닌 사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가장 크고 중요한 시험이자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과거시험에서는 본인이 시험을 치룰 종이를 직접 가지고 와서 시험을 치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글씨

중세 한국어는 한국어의 역사 가운데 10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해당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한국의 역사 구분으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일부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언어 내적인 시대 구분에서 고대 한국어와 근대 한국어를 잇는 구실을 하는 시기가 됩니다. 이 시기는 훈민정음이 반포되면서 한국어에 잘 맞는 표음문자로 된 표기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한국어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가 아주 풍부한 시기였으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 이 시기에 고려의 건국과 더불어 중앙어가 중부 방언으로 이동하면서 이전까지 동남 방언이 중심어였던 시기와는 다른 양상의 언어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중세 국어 시기에는 표기법상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전 시기 국어 표기에는 주로 향찰, 이두 따위의 차자표기 방식이 사용되어 그 음가를 정확히 알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15세기 훈민정음이 발명되어 일반 언중 사이에 널리 쓰이면서 문자 사용 인구가 늘었고, 회화와 문자가 적으나마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와 사용법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세종 25년에 창제된 후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며, 처음으로 한글이라 불리우게 된것은 1908년경이고 주시경 선생에 의해 이름이 지어진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반포된 초기에 '정음'으로도 불리웠고 그밖에도 언문, 언서, 반절, 암클, 아햇글 등으로 불리우면서 양반들에 의해 홀대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자에 비해서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가 쉬웠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에는 한국어를 표기하는 공식문자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종이

종이의 어원은 라틴어인 파피루스(papyrus)입니다. 파피루스는 수초의 이름으로, 4000년전 이집트 나일강 강변에서 자랐습니다. 껍질을 물에 담가 불리고, 여러겹 겹쳐 두들겨 사용했던 고대의 기록수단이었습니다. 종이는 이와 다르게, 식물섬유나 합성섬유 등을 원료로 하여 엉키게 한 다음 건조에 의하여 탄성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점착에 의하여 형상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종이는 기원전 40-50년대의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105년경 보급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초기의 종이는 삼베를 재료로 한, 만들기 쉬운 마지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종이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출토된 종이를 분석해본 결과 한나라 시대쯤 일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종이제조기술이 전수된 시기도 논란이 많은데, 610년 담징이 일본에 종이제조기술을 전수 한 것으로 보아 그 전일 것으로 추청됩니다. 우리나라의 종이제조기술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점점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종이의 원료도 삼베나 모시에서 닥나무로 바뀌면서, 종이의 질은 점점 좋아졌고 11세기 이후부터는 중국에 종이를 수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종이의 대량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1415년 국영 제지공장인 제지소가 설치되어 종이의 생산에 박차가 가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원료인 닥나무의 대량생산과, 새로운 품종의 도입도 같이 이루어졌고, 외국에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등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우리나라 고유의 종이인 한지를 발전시켜 나아갔습니다.

조선시대의 종이의 가격은 비싸서 서민들은 종이를 쓰기가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글씨연습으로 종이를 쓴 다는 것은 양반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낭비였습니다. 종이의 대량 생산이 진행된 조선 시대의 종이는 왜 비쌌을까요? 바로 노동력 때문이었습니다. 종이 한 장을 제작하는데 드는 노동력이 매우 많이 들어, 지방의 농민들과 승려들이 반 강제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원하지도 않는 노동에 투입되었기에, 당연이 종이의 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국가에서 종이의 생산량을 제한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종이의 공급이 줄어들고, 가격은 오르게 됩니다.

 

조선 시대의 금속활자술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제지술과 함께 활자술이 발전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1377년에 간행되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더욱 개량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계미자(1403: 태종 3경자자(1421: 세종 3갑인자(1434: 세종 16) 등이 있습니다. 계미자는 조선 시대 최초의 구리활자로, 1403년 태종의 명령으로 활자를 만드는 주차소를 설립하고 만들었습니다. 10만자 정도 제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계미자는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또 주조가 거칠어 인쇄하는 도중 활자동요가 자주 생겨 능률이 오르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를 세종떄 보완한 것이 바로 경자자입니다. 끝이 뾰족했던 활자의 모양을 네모 반듯하게 수정하고,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으로 각 활자의 빈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채택하여 비용 절감과 인쇄량, 인쇄효과의 증진을 이루어냈습니다. 갑인자는 1434년 만들어진 동철활자입니다. 경자자보다 모양이 크고, 바르고 깨끗하며, 20만자를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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